이곳은 개발을 위한 베타 사이트 입니다.기여내역은 언제든 초기화될 수 있으며, 예기치 못한 오류가 발생할 수 있습니다.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,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.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죽음의 행진 (문단 편집) ==== [[베트남]]의 죽음의 행진 ==== (1차 [[베트남 전쟁]] 또는 인도차이나 전쟁이라고도 불리는) 베트남 독립 전쟁, 특히 [[디엔 비엔 푸 전투]] 당시 베트민군도 [[프랑스 외인부대|외인부대]]원 등 [[프랑스군]] 포로를 상대로 장거리 행진을 시켰다. 먹을 거라곤 하루에 미숫가루나 생쌀 한 줌이나 주었을 정도였고, 베트남인들에게 식민지 [[프랑스]]인 및 용병인 외인부대에 대한 증오로 가혹하게 대하면서 1만여 명이 넘는 포로 가운데 3천 명 정도만 살아남았다. 예외적으로 [[독일]] 국적의 외인부대원 중 [[동독]]으로 귀국할 의사를 피력한 포로에 한해 동맹국과의 우호 강화 차원에서 조기 석방 및 귀국시켜줬다. 다만 이걸 원한 때문이라고는 할 수 없는 게, 2차 베트남 전쟁 때도 미군 포로들을 상대로 가혹행위가 이뤄졌다. 그나마 미군이나 다른 국가 포로는 이렇게 포로 대우를 했지만, [[한국군]] 포로는 아예 포로로 인정하지 않고 북한으로 압송한 사례도 확인된다. 웃기게도 [[프랑스]]는 내외 선전을 위하여 베트남 포로들을 일단 배불리 먹여서인지 몸매는 그다지 마르지 않은 이들과, 이 행진으로 뼈만 남은 채로 마른 프랑스군 및 외인부대 포로들이 극과 극으로 포로 교환이 되는 일이 있었다. 물론 그렇다고 프랑스가 베트남인에게 잘 대한 건 절대 아니다. [[단두대]] 항목에도 나오듯이 실제로는 베트남 저항인사를 고문 및 단두대로 [[참수]]하던 프랑스가 한 선전 홍보에 지나지 않았다. 이는 이후 [[남베트남]]이 멸망한 다음 벌어진, 피살자만 8~10만 명에 달하는 대규모 보복을 예고한 것이기도 했다. [include(틀:문서 가져옴, title=바탄 죽음의 행진, version=90)]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-BY-NC-SA 2.0 KR으로 배포하고,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.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.캡챠저장미리보기